손재권 | 더밀크 대표
2026년, 세상을 가장 크게 바꾸고 있는 2개의 기술이 있다. 하나는 인공지능(AI)이다. 엔비디아, 구글, 오픈에이아이, 앤트로픽 등 빅테크들은 범용인공지능(AGI) 개발에 올인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는 다이어트 주사로 소개되는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 약물이다. 이는 제약을 넘어 미국 식품·화장품 등 소비재 산업 전반의 전략까지 재편하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이 두 산업을 이끄는 두 회사가 ‘앤트로픽’과 ‘노보 노디스크’다. 전혀 달라 보이는 이 두 회사의 공통점이 있다. 회사 위에 ‘재단’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덴마크 제약기업 노보 노디스크의 공동 창업자엔 크로그 부부가 있다. 남편은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였고, 아내는 당뇨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의사였다. 인슐린을 상업화하면서 이들이 가장 두려워한 건 경쟁자가 아니라 ‘미래의 자기 자신’이었다. 환자 생명을 담보로 수익을 내는 회사가 독점적 지위로 가격을 올리다 결국 ‘공정 가격의 의무는 없다’고 깨닫는 순간을 우려한 것이다. 크로그 부부는 그 위험 차단을 회사 구조 자체에 못박았다. 영리 회사의 지분을 비영리 재단이 소유하며 의결권 다수를 행사하는 ‘산업재단’ 구조다. 재단 정관은 못박는다. 이 지분은 매각될 수 없다.
이 구조가 100년을 버텼다. 노보 노디스크는 비만치료제 위고비와 오젬픽으로 세계를 흔들었고, 2023년에는 시가총액이 모국 덴마크의 한해 국내총생산(GDP)을 넘어섰다. 2025년 일라이 릴리에 추격당하며 주가가 60%가량 빠지는 위기에도 헐값 매각이나 경영권 탈취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관이 그것을 법적으로 막아두었기 때문이다.
앤트로픽도 같은 계보 위에 있다. 챗지피티가 세상에 나오기 전, 창업자 다리오 아모데이가 이 회사를 ‘공익기업’으로 등록하고 별도의 ‘장기 이익 신탁’을 두기로 했을 때 “미친 짓”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신탁 위원은 회사 지분을 갖지 않는 인공지능 안전 전문가들이고, 이들이 영리 이사회 일부를 지명한다.
실제 앤트로픽은 최신(프런티어) 모델이 보안에 위험하다고 판단해 ‘미토스’ 출시를 미뤘으며 2억달러(약 3천억원) 규모의 국방부 계약도 거절할 수 있었다. 기존 회사라면 행동주의 펀드가 최고경영자(CEO)를 갈아치웠을 결정들이다. 그런데도 앤트로픽은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인공지능 회사가 됐고 최고 인재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 하는 회사가 됐다. 가장 큰 이유는 “이 회사는 자기 사명에서 이탈할 수 없도록 설계돼 있다”는 신뢰다.
두 회사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좋은 회사를 오래가게 하는 것은 창업자의 의지가 아니라, 창업자 본인조차 배반할 수 없도록 묶어두는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로스쿨에 따르면 표준 거버넌스로 상장한 미국 벤처기업 중 3년 뒤에도 창업자가 최고경영자로 남아 있는 비율은 20%에 그친다. 미국에선 회사가 망해서가 아니라, 회사가 ‘잘나가서’ 사라지는 최고경영자가 많다.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한국에는 왜 이런 회사가 없을까? 한국 상법은 산업재단 구조를 사실상 허용하지 않고, 공익재단은 대체로 총수 일가의 지배권을 우회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노보 노디스크 재단은 정반대다. 창업자 일가의 지배를 위한 장치가 아니라, 창업자 본인도 사명에서 이탈할 수 없도록 손발을 묶는 장치다. 같은 ‘재단’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작동 원리가 다르다.
인공지능, 바이오, 딥테크 시대의 창업자들이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이 만든 회사가 10년 뒤 세계적 제품을 만들었을 때, 그 회사의 사명을 “누가” 지킬 것인가. 정관 어디에도 그 답이 적혀 있지 않다면 “아무도 지키지 않는다”. 100년 가는 회사를 원한다면, 필요한 건 더 많은 자본이 아니라 더 정밀한 구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