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 |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도널드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학계와 관료 집단의 워싱턴 주류는 여전히 중국과의 지정학적 경쟁을 중시한다. 미국 중심의 양자 동맹체제를 넘어 동맹국들을 서로 연결하는 ‘격자형 안보’ 추구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일본·필리핀의 군사 역량을 연계하자는 ‘킬 웹’(Kill-Web) 구상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의 발언이 잇따라 논란이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한국을 ‘중국과 일본 사이 항공모함’에 빗대는가 하면, 한반도를 ‘중국의 심장부를 겨누는 단검’에 비유하기도 했다.
반면 인도·태평양 전략(인태 전략)의 전략적·군사적 성격이 약화되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미국은 2020년대를 미-중 경쟁의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 10년”이라는 결의를 보인 반면, 트럼프 2기 들어서는 중국과의 “괜찮은 평화”(decent peace)로 물러서고 있다. 특히, 대만을 “협상 칩”으로 언급하는 등 대만 정책에서도 변화의 신호가 감지된다. 즉, 트럼프 행정부는 인태 지역에서 강력한 군사적 억제와 압박보다는 경제적 측면의 경쟁과 타협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결국 현재 미국의 인태 전략은 트럼프 대통령의 우선순위와 관료 집단의 제도적 관성이 공존하는 이중적 상태에 놓여 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인태 전략의 지속이, 다른 한쪽에서는 인태 전략의 실종이 거론되고 있다. 그만큼 미국이 보내는 메시지가 혼란스럽고, 미-중 관계와 동아시아 질서의 미래를 둘러싼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중요한 점은 미국의 동맹국들이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이다. 일본은 대중 군사적 견제를 위한 ‘통합 억제’(integrated deterrence)에 여전히 적극적이다. ‘하나의 전장’, ‘역내 안보의 불가분성’과 같은 지정학적 연결성을 강조하며, 미국·필리핀·오스트레일리아 등과의 군사훈련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또한 자위대의 해외 전개에 필요한 원활화협정(RAA), 연료·탄약·정비 지원 등을 상호 제공하는 군수지원협정(ACSA)을 역내 국가들과 체결하는 데도 적극적이다.
일본의 지정학 사고는 역사적 뿌리가 깊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이후 한반도를 자국 안보의 ‘이익선’으로 인식해왔고,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일본의 세력권으로 편입해 관리해왔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에는 한반도와 대만을 일본 진영에 묶어 두는, 이른바 ‘극동 1905년 체제’를 이뤄낸 바 있다. 주목할 부분은 태평양전쟁 패배 이후에도 이 질서의 기본 구조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차 대전 이후엔 미국의 힘에 의해 일본 안보에 긴요한 한반도와 대만이 같은 진영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의 부상은 이러한 일본의 역사적 기억과 지정학적 인식을 다시 자극하고 있다. 동아시아에 중국 중심 질서가 형성된다는 것은 120년 이상 지속되어온 기존 질서의 전복이자, 일본의 이익선이 위협받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의 인태 전략이 흔들릴수록 일본은 더욱 절박하게 반응하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관점은 어떠해야 할까? 한국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급격한 후퇴와 중국의 지배적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 지정학적 조건은 일본과 다르다. 역사적으로 한국에 중국은 대결과 극복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견제와 적응이 동시에 요구되는 복합적 존재였다. 무엇보다 한국은 강대국 세력권이 중첩하는 지정학적 경쟁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다. 일본처럼 본토 안전을 위해 인접 국가를 이익선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리적 여유가 없는 나라다. 따라서 한국은 자유주의 진영과의 협력을 강화하되, 군사적 반중 연대보다는 첨단기술, 공급망, 방산 협력 등에 중점을 둔 ‘연성 균형’(soft balancing)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모든 국가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질서의 대전환기에는 각종 전략 개념이 범람하기 마련이다. 한국 역시 다른 나라의 지정학적 사고를 이해하되, 우리만의 전략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미국의 급격한 후퇴와 중국의 패권적 지배를 모두 방지하면서 관리된 경쟁과 안정적 공존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한국 지정학이 지향해야 할 현실적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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