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구진, 끓이지 않고 원유 걸러내는 ‘분리막’ 기술 개발
한겨레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으로 막혔다가 최근 봉쇄가 풀린 호르무즈해협은 전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경로로 꼽힌다. 거대한 유조선으로 수송된 원유를 사용 목적에 따라 분해하려면 거대한 탑에서 팔팔 끓여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 소비와 온실가스 배출이 불가피하다.
국내 연구진이 원유를 끓이지 않고 걸러내는 기술을 발표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카이스트) 생명화학공학과의 고동연 교수 연구팀이 ‘다공성 고분자 막’(PAN)을 이용해 원유를 상온에서 정밀하게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고 25일 밝혔다. 연구팀이 수행한 연구 결과는 과학저널 ‘네이처’에 게재됐다.
원유는 탄소 사슬의 길이가 각기 다른 다양한 탄화수소가 섞인 혼합물이다. 여기서 휘발유, 나프타, 경유 등을 뽑아내려면 원유를 끓였다가 식히는 ‘증류’ 방식에 주로 의존한다. 탄소 수가 적을수록 끓는점이 낮다는 점을 이용해 걸러내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연간 1100TWh(테라와트시)에 달하는 에너지가 들고, 1억6천만톤의 온실가스 배출이 뒤따른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분리막’을 활용해 원유를 끓이지 않고 상온에서 걸러내는 연구에 주목해 왔다. 다만 여러 성분을 걸러내기 위해선 그만큼 복잡하고 정교한 화학 구조의 ‘선택층’을 분리막 위에 코팅해야 하는 것이 큰 걸림돌로 꼽혔다. 비용이 높아질 뿐 아니라 실제 구현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아예 아무런 화학적 코팅이 없는 값싼 기본 받침대인 ‘다공성 고분자 막’에 원유를 그대로 흘려보내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는데, 뜻밖에도 시커먼 원유가 맑게 걸러지는 것을 확인했다. 무거운 기름 성분이 분리막 내부의 미세 구멍에 스스로 들러붙어 2나노미터 이하의 통로를 자발적으로 형성한 것이다. 원유가 분리막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자신을 거르는 ‘체’를 만든 것이다. 이후 4년 이상의 연구를 통해 연구진은 그 원리를 밝혀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좁은 공간에 갇힌 물질일수록 더 낮은 온도에서도 응고 상태를 유지하는 현상(‘깁스-톰슨 효과’) 덕에, 원유 속 탄소 사슬의 길이가 긴 분자들부터 미세 구멍 안에 자리를 잡되 구멍 전체를 막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원리를 활용해 연속적으로 원유를 여과한 결과 기존 분리막 기반의 여과 방식보다 23배 이상의 투과도를 달성했고, 28일 연속 가동에도 분리 성능과 투과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됐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특히 이 기술의 가장 큰 매력은 “공장을 새로 짓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라고 연구팀은 강조했다. 기존 증류탑을 헐거나 공정을 멈출 필요 없이, 기존 배관 사이에 분리막 모듈만 끼워 넣기만 하면 나프타, 휘발유 등을 먼저 분리한 뒤 남은 성분만 기존 증류탑에서 증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방식을 쓸 경우 기존의 증류 공정에 견줘 에너지 31.6%, 냉각수 20.7%, 이산화탄소 배출 37.6%, 운영비 36%를 절감할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도 제시했다.
연구팀은 “앞으로 국내 정유·석유화학 공정 곳곳에 끼워 넣을 수 있는 대면적 모듈화 기술과 장기 운전 기술을 완성해 100년간 증류가 지배해 온 정유 산업을 분리막 공정으로 전환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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