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24일 서울 강남·강북을 잇는 143번 버스 종점에서 정릉천을 건너 북한산 기슭으로 들어가니 붉은색 래커칠이 곳곳에 낙인처럼 찍혀있다. 구불구불 언덕길 주위엔 쓰레기가 쌓였고, 수풀이 우거진 빈집들이 버티고 있었다. 1960~70년대 청계천과 북아현동 판자촌 철거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일군 달동네, 정릉골이다. 성북구 정릉동 757번지 일대 국공유지 6만9711㎡를 비롯한 20만3857㎡(약 6만1670평) 땅엔 지하 2층~지상 4층 고급 타운하우스 1400여가구를 짓는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2024년 1월 관리처분계획 인가 뒤 주민 90%가량은 마을을 떠났다.
그곳 한편엔 김우권(62)씨 부부와 반려견 ‘봄’이 10여년간 살아온 10평 남짓한 집이 있다. 김씨는 이날 목재와 철판을 덧대 ‘방어벽’을 만들어 현관 앞에 세웠다.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이 낸 건물 인도 소송 결과에 따라 27일까지 집을 비우지 않으면 ‘예고 없이 강제집행’한다는 법원 서류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간살이도 챙기지 못하고 쫓겨날까 봐 불안이 크다. 그를 포함해 세입자 21가구와 무허가 건물 소유주 등은 정릉골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했다.
성북제일교회 첨탑 아래, 낡은 슬레이트 지붕 건물은 정덕영(57)씨 부부 집이다. 2024년 3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15만원을 주기로 하고 이사 왔다. 불과 5개월 뒤 이주해야 한다는 설명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 빗물이 새는 집이지만 아내 손길이 닿은 곳마다 꽃이 자랐다.
정릉골의 주거 환경은 열악하다. 2003년까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였고, 도시가스도 들어오지 않는다. 기름값이 부담스러운 이들은 연탄으로 겨울을 났다. 2000년대 중후반 재개발 가능성이 커지자 투자성 매매가 잦아졌다. 빈집이 늘고 낡은 집이 방치되면서 싼 임대료로 들어올 수 있었다.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2012년 당시 성북구의회 자료를 보면, 1237명 중 930명이 세입자였다. 그러나 경제·사회적으로 취약한 이들은 재개발 과정에서 배제됐다. 성북주거복지센터가 2024년 10월 38가구에 재개발 사업에 대해 물었더니 17가구가 “모른다”고 했다. 필요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됐을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은 관련 법에 따라 정비구역 지정을 위한 공람 공고일(2009년 9월30일) 석달 전을 기준으로 그 전부터 살아온 무주택 세입자들에게 공공임대주택 입주 자격과 주거 이전비(공람 공고일 이전부터 거주한 이들)를 주기로 했다. 이사비 84만~260만원(2024년 3월 기준)도 사업시행계획 인가일(2021년 12월30일) 이전부터 거주한 사실을 증명해야 받을 수 있다.
박수영(63)씨는 2005년께 정릉골로 왔지만 보상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가 보여준 임대계약서엔 ‘그린시설(근린생활시설을 잘못 쓴 것으로 보임)이라 전입 신고는 못한다’고 돼 있다. 그래서 주소도 제때 옮기지 못했다고 했다. 이효진(57)씨는 4살부터 정릉골에서 살다 2009~2011년만 다른 곳에 거주해 보상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집에는 미성년인 자녀가 둘 있다.
정릉골에 짓는 고급 주택 단지엔 공공임대가 한 채도 없다. 국토교통부 고시는 자연경관지구에서 7층 이하 층수 제한을 받으면 공공임대 의무 비율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정릉골을 찾아 예배회를 여는 이종건 옥바라지선교센터 목사는 “개발을 하더라도 자연경관과 동네의 역사성,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을 고려해야 했다”며 “서울 임차 가구 평균 거주 기간이 3~4년인데 2009년 6월 이전부터 거주한 세입자와 아닌 경우를 나누는 데 대해 재검토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