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권·강제력' 없는 경찰 영사 한계…현지 기관 신뢰와 개인기 의존
필리핀대사관, 주범 도주에 해외 도피 차단 등 지속해 당국 협조 요청
(마닐라 EPA=연합뉴스) 2016년 10월 필리핀에서 발생한 현지 경찰관들의 한국인 사업가 납치·살해 사건을 규탄하는 인권 단체의 시위가 2017년 1월 마닐라 경찰청 본부 앞에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필리핀 한인 사업가 고(故) 지익주(당시 53세) 씨 납치·살해 사건의 주범인 전직 경찰 라파엘 둠라오가 도주한 지 약 2년 만에 검거된 데는 우리 재외공관의 전방위적 외교 압박과 경찰 영사들의 숨 가쁜 사투가 있었다.
이들의 헌신이 주범 검거의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으나, 동시에 국경을 넘어서는 공권력의 한계 속에서 정부의 재외국민 보호 시스템이 얼마나 실무자 개인 역량에 의존하는지를 보여주는 안타까운 현실의 단면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유족과 약속 서승환 전 영사 "진실 밝혀질 거란 믿음 있었다"
지씨 사건 전후 필리핀에서 8년 동안 코리안데스크와 경찰 영사로 근무한 서승환 경정(현 서울 영등포경찰서 여성청소년과장)은 "반드시 범인을 검거해 진실을 밝히겠다"는 유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임기 내내 피 말리는 시간을 보냈다.
2023년 귀임 직후 들려온 1심 무죄 판결 소식은 그에게 큰 충격과 무력감을 안겼다. 서 경정은 "다만 수사와 공판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입장에서 진실은 결국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해외에서 근무하는 경찰 영사들이 마주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타국의 범죄자가 아니라 제도적 권한의 부재다. 코리안데스크는 양국 정부 간 합의에 근거해 활동하지만, 철저히 주재국 경찰의 수사를 지원하는 역할에 머무른다.
현지에서 확실한 첩보를 입수하고 도주범의 은신처를 눈앞에 두고도, 필리핀 경찰의 승인과 동행이 없으면 현장 진입을 할 수 없다. 눈앞에서 범인을 놓칠 위기에도 수갑을 채울 권한 역시 없다. '사법주권'이라는 견고한 국경의 벽 때문이다.
지씨 사건처럼 가해자가 필리핀 전·현직 경찰 간부들이고, 범행 장소가 경찰청 본부인 상황에서 조직적 은폐와 비협조라는 장벽은 개인이 뚫기에는 만만치 않다.
결국 경찰 영사들은 제도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교민 사회의 비공식 정보망을 가동하고, 평소 쌓아둔 필리핀 경찰 내 인맥을 총동원하는 방식으로 우회로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동포사회에서는 재외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수사가 공식적인 사법 공조 매뉴얼이 아닌, 교민들의 연대와 영사의 인맥이라는 개인기에 의존해온 한계가 있다고 짚는다.
서 경정은 "현재 코리안데스크 체계는 살인 등 중대 강력 사건이 터진 후에야 사후 수사 지원 위주로 가동되는 측면이 강하다"며 "교민들이 쉽게 도움을 요청하고 상담받을 수 있는 창구가 확대된다면 체감하는 보호 수준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이상화 주필리핀 한국대사. 존빅 레물라 필리핀 내무부 장관, 호세 멜렌시오 나르타테즈 필리핀 경찰청장. [유족 최경진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주범 도주에 대사관 '발칵'…이민청·대법원 등 전방위 압박
항소심 선고 이후 주범이 도주했다는 사실이 연합뉴스 보도로 알려지자, 상황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에는 비상이 걸렸다. 필리핀 사법당국의 공식 통보나 정보 공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발생한 공백이었다.
대사관은 즉시 필리핀 경찰청은 물론 내무부, 국가수사국, 검찰, 이민청,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사법·치안 관련 모든 기관을 대상으로 전방위적인 압박 작전에 돌입했다.
이상화 대사가 각 기관장을 잇달아 면담하며 사안의 심각성을 전달했고, 경찰 영사 등 실무선에서도 매일 같이 대면 접촉을 이어가며 필리핀 당국의 검거 활동을 독려했다.
대사관은 2025년 10월 둠라오에게 내려진 대법원의 무기징역 확정판결을 근거로 '최종적이고 즉각 집행이 가능하다'는 필리핀 현지 법리를 인용해 필리핀 당국을 압박했다.
주범의 도주는 필리핀 대법원의 확정판결과 공권력 자체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는 논리로 현지 사법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러나 추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여러 경로로 도피 첩보와 제보가 접수돼 우리 경찰 영사팀과 코리안데스크 수사관들이 필리핀 수사당국과 현장을 확인하고 관찰했으나 결정적인 단서로 이어지지 못하는 좌절의 순간이 반복됐다.
대사관 관계자는 "주범이 이미 해외로 도주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첩보를 접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면서도 "끝까지 추적한다는 일관된 의지와 메시지를 관계 기관에 지속해서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경찰 영사의 끈질긴 현장 추적과 대사관의 고위급 채널을 통한 압박 등 투트랙으로 진행된 외교전은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필리핀 당국이 수사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드는 방어막 역할을 했다.
(필리핀=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이재명 대통령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3일 필리핀 마닐라 말라카냥궁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2026.3.3 xyz@yna.co.kr
◇ 톱다운 정상외교 힘 보여줬으나…씁쓸한 사법공조 현주소
주범의 도피가 장기화하자 필리핀 수사기관 내부에서도 피로감이 팽배해졌다. 필리핀 현지 홍수 통제 관련 대규모 부패 수사와 두테르테 전 대통령 시절 '마약과의 전쟁' 관련 국제형사재판소(ICC) 조사 등이 맞물리면서 검거 동력 약화 우려도 나왔다.
지씨 사건이 필리핀 사법당국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영구 미제가 될지 모른다는 극심한 초조함이 대사관을 짓눌렀다.
이 교착 상태를 깨뜨린 것은 결국 최고위급 정상 외교였다. 지난 3월, 이재명 대통령은 필리핀 국빈 방문 당시 마르코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이 사안에 대한 엄정하고 신속한 해결을 강하게 요청했다.
이에 마르코스 대통령이 회담 현장에서 직접 관련 지시를 내리면서 지지부진하던 필리핀 당국의 검거 작전은 급물살을 탔고, 마침내 주범 검거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다만 성과의 이면에는 사법공조의 씁쓸한 현주소도 드러났다.
정상외교의 동력이 없었다면 주범을 검거할 수 있었을지, 정상 외교를 통한 압박이 있어야만 작동하는 사법 시스템이라면 매번 불확실한 외교전에 운명을 걸어야 하는지 등 물음표도 남는다.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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