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한인 납치·살해 사건 주범, 도주 2년 만에 검거
주범 도주 단독보도 후 정상간 의제화…'요행의 치안' 아닌 '시스템 전환' 목소리
[※ 편집자 주 = 2016년 10월, 필리핀 경찰청 본부(PNP)에서 대한민국 재외동포 고(故) 지익주 씨가 현직 경찰에게 납치·살해된 지 어느덧 10주기를 앞두고 있다. 주범 도주 사실을 단독 보도했던 연합뉴스는 최근 주범 검거를 계기로, 낯선 타국 법정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낸 유족의 눈물과 '타국 사법주권'이라는 장벽 속에서 우리 재외국민 보호 체계가 던지는 과제 등을 3차례에 걸쳐 진단한다.]
[유족 최경진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남편이 필리핀 경찰에 납치됐는데, 대사관에서는 그 경찰들에게 신변 보호를 받으라고 했어요. 그 순간 국가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허술한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온 필리핀 한인 납치·살해 사건 피해자 고(故) 지익주(당시 53세) 씨의 부인 최경진 씨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최씨에게 지난 10년은 국가의 존재를 끊임없이 되묻게 한 시간이었다.
◇ 현실적 한계에 진실 위해 싸운 유족…사법부 벽 높았다
2016년 10월 18일, 마약 단속을 빌미로 필리핀 경찰관들이 앙헬레스의 자택에서 지씨를 연행했다. 그들이 지씨를 끌고 간 곳은 필리핀 마닐라의 경찰청 본부(PNP) 주차장이었다.
백주에 타국의 치안 심장부에서 한인 동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현지 공권력에 의해 목을 졸려 살해당한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고, 국가가 자국민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 국민이 타국 공권력의 잔혹한 범죄로 목숨을 잃었음에도, 기성 언론은 사건의 자극적인 단면만 소비한 뒤 더 이상 주목하지 않았다.
타국 사법부에서 진행되는 법정 공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를 이유로, 언론과 한국 사회의 관심은 차갑게 식어갔다. 10년의 세월 동안 그 짐은 오롯이 유족의 어깨에 지워졌다.
[필리핀한인총연합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최씨는 남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직접 발로 뛰었다. 대사관 조력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사비로 통역을 고용하고 현지 로펌을 선임했으며, 가해자들의 노골적인 살해 협박 속에서 수시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
이 과정에서 외교 당국은 '주재국의 사법주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론을 내세웠다. 영사 조력은 제한적인 통역 지원과 재판 참관에 머물렀고, 범죄 피해자에 대한 법률 비용이나 생계 지원은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가로막혔다.
유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사법부의 벽은 높았다. 2023년 1심 법원은 전직 경찰 간부인 주범 라파엘 둠라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2024년 6월 말 2심 법원은 1심 판결을 뒤집고 둠라오에게 종신형(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문제는 그 직후에 터졌다. 2심 법원이 이례적으로 '중대한 재량권 남용'을 인정했음에도 필리핀 당국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둠라오가 도주한 것이다.
도주 사실 파악 직후 필리핀 당국은 최대 200만 페소(약 5천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전국적인 수배령을 내렸지만,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도피 행각이 이어지던 2025년 10월 필리핀 대법원은 둠라오의 상고를 기각해 무기징역형이 최종 확정됐다.
[Philippine News Agency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침묵 깬 연합뉴스 집요한 추적 보도…공론장 다시 열다
모두가 끝났다고 체념하던 순간 사태의 본질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연합뉴스의 연속 추적 보도였다.
세간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져 가던 2023년 1심 무죄 판결 선고 현장부터 2024년 종신형 선고 사실을 알린 첫 보도 등 영구 미제로 묻힐 뻔한 사건의 변곡점마다 사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특히 주범 도주 사실을 단독 보도한 연합뉴스는 도피 경로를 다각적으로 취재하고 필리핀 사법당국의 방조 의혹 등을 정면으로 파헤쳤다. 이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와 국회의장실 등 정치권이 움직였고, 필리핀 동포사회도 다시 힘을 모았다.
2024년 10월에는 한-필리핀 정상회담에서 주범 도주 문제가 화두에 올랐다. 이재명 대통령도 올해 3월 양국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며, 신속한 해결을 강력히 촉구했다.
양국 정상회담 직후 우리 정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 적색수배가 전격 발령되면서 둠라오를 향한 국제적인 포위망이 한층 좁혀졌다.
우리 정부의 단호한 요구와 끈질긴 국제 공조에 필리핀 당국은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돌입했고, 지난 9일 약 2년간 도피 중이던 주범을 마침내 검거했다.
동포사회에서는 언론이 포기하지 않고 '지연된 정의'를 끝까지 추적할 때 사회를 변화시키는 불씨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EPA=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지씨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과거보다 사건·사고 발생 건수는 줄었지만, 현재도 필리핀에서 한인 피해는 계속되고 있다. 최근 5년간(2020∼2024년 상반기 기준) 필리핀 한인 범죄 피해자는 3천181명이다.
그중 얼마나 많은 사건이 '8년 전 사건' 또는 '필리핀 사건'이라는 이유로 언론과 한국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을지 되짚어봐야 한다는 의견이 동포사회에서 나온다.
[영상] '한인 납치·살해' 주범 필리핀 전직 경찰 1년9개월 도주끝 검거[http://yna.kr/AKR20260620024100371]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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