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준호 | 이슈팀장
‘말을 하고 싶은 마음과 내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에 평소보다 수줍은 마음이 옅어졌다.’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나폴리 4부작’ 2권(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쯤에 주인공 레누가 사회에 대한 ‘첫 분노’를 말하는 순간이 묘사된다. 후일담인 소설은 다소간 냉소를 더해 당시를 떠올리지만, 그렇다고 가치 없는 기억일 리 없다. 모두가, 나 역시 첫 분노를 그렇게 말했다. 드러내고 싶은 열망이 말의 내용보다 앞서 초조했고, 어디선가 들은 단어를 조합한 문장이 어수선하진 않을까 긴장했다. 그러다 내 말에 누군가 고개를 끄덕여준 순간, 세계의 주연 자리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서로 끄덕이며 분노는 함께 자랐다. 그런 첫 분노들이 모여 어느 때 정말 세상을 뒤집었다고 들었다. 공허한 메아리로 사그라든 기억이, 실은 대부분이다.
‘처음’이라는 사람이 무척 많다고, 올림픽공원 시위를 취재하는 기자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전해주었다. 인스타그램에는 얼굴에 태극기를 그리고 스케치북에 손수 적은 구호를 든 ‘감도 높은’ 사진이 전해졌다. 앞선 스토리가 온통 일상과 여행의 단면을 전하는 고운 것들이었던 것을 보면, 이번이 세상을 향한 첫 분노인 것은 의심할 수 없었다. 필터가 더해진 사진과 세련된 옷차림이 낯설었지만 말하고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만은 익히 알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고 싶다”는 호소 뒤에는 #민주화운동, #멸공, #부정선거 같은 태그가 주로 적혔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절차인 투표권 침해는 첫 분노를 발화할 만한 대상이었다. 불평등이 고착된 2010년대 이후, 청년이 그나마 꾸준히 외쳤던 구호가 ‘절차의 공정’임을 고려하면 나름의 맥락과 확장, 어쩌면 도약의 여지도 있었다. 담론에서 늘 조연 자리에 머물러온 청년에게 조금은 마음 써온 이들이라면 기꺼이 곁에서 끄덕여야 했다. 애석하게도 첫 분노는 곧장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향했다.
분노가 놓인 공간은 복잡했다. 고작 1년6개월 전, 청년은 물론 모든 시민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망상이 먼저 자리 잡았다. ‘본투표에서 용지 부족이 발생해 일부 시민이 투표하지 못한’ 사태가 ‘중국 공산당이 전산을 조작해 사전투표에 개입’한 부정선거의 증거로 천연덕스럽게 바꿔치기당한 상태였다. 선거관리위원회, 투표, 부실과 부정이라는 엇비슷한 단어들을 정신없이 뒤섞었다. 그사이 논리적인 비약을 한층 더 황당한 음모론(중국인을 위해 만든 투표용지가 급히 회수돼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으로 메우는 얘기까지 돌았다고 한다.
첫 분노를 도둑맞았다. 무능을 드러낸 기득권, 견제받지 않는 부패를 향해 화낼 기회를 어느 청년은 잃었다. 선진국이라는 이 나라에 왜 이토록 황당한 구멍이 많은지, 절차조차 공정하지 않은데 무엇을 바라며 노력하라는 것인지 물을 수 없었다. ‘프락치’라는 공격 앞에 “전라도, 민노총 싫어합니다”(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의 한 사용자)라는 무망한 변명만 반복해야 할 처지였다. 여당은 합당한 첫 분노를 음모론과 구분하려는 고민조차 없는 것 같았고, 야당은 이 혼란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올림픽공원 시위가 시작된 지도 어느덧 한달 되어간다. 그사이 마주 끄덕여줄 이를 발견한 어떤 첫 분노는 더 맹렬해졌을 것이다. ‘스톱더스틸’을 세상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마음먹었을지 모르겠다. 올림픽공원에서 경찰을 폭행해 구속된 한 여성(그는 40대였다)은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조차 “부정선거 재선거”를 외쳤다. 인정받은 분노는 사회적으로도, 한 사람의 삶에서도 그토록 끈질기다.
분노는 또한 한없이 미약하다. 어떤 첫 분노는 같이 끄덕여줄 누군가를 찾지 못해 다시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익숙했던 자리, 세계의 조연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혼란한 올림픽공원에서 우리는 어떤 위험을 키우고 어떤 가능성을 잃은 것인지, 진지하게 되짚는 목소리가 아직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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