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삶도 버틸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국내에 출판된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원제목은 ‘Man's Search for Meaning’이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이탈리아 속담처럼 번역은 어려운 일이다.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서기 위함이었겠지만, ‘Meaning’이 빠지면서 속없는 찐빵이 되어버렸다. 책을 관통하는 ‘의미’가 제목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저자 빅토르 프랭클과 가족은, 나치 독일의 패색이 짙어가던 이차대전 막바지에 악명높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그리고 연합군에게 구출될 때까지 잔혹한 시간을 버텨야 했다. 국내판 번역의 방점은 역경을 극복한 인간승리에 찍혀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백미는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동료 수감자들을 관찰 분석하여 의미치료(logotherapy)를 창시하는 과정이다. 수감자들은 비참한 환경에 동일하게 노출되었지만, 누구는 존엄한 삶을 누구는 짐승 같은 삶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강한 생존본능을 투사했던 후자의 경우, 정작 자유를 얻고 난 뒤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여기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차이가, 주어진 환경이 아닌 이를 받아들이는 자유의지에 있다고 통찰한 프랭클은 니체를 인용한다. 선구자의 운명이 보통 그러하듯, 니체도 살아서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현대 철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은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한참 뒤의 일이다. 끊임없이 삶의 벼랑으로 내몰렸던 니체의 철학적 사유도, 왜 사는지에 대한 자유의지의 대답을 찾는 것이었다.
‘왜’라는 질문이 왜 중요한가
대한민국 교육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적절한 질문을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무엇을, 그리고 왜; 질문에는 여섯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왜’는 자유의지를 묻는 특별한 질문이다. 시지프스의 형벌이 고통스러운 것은 왜를 알 수 없는 행동을 끝없이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너무 똑똑하기에 의미없는 행동을 견디지 못한다. 왜는 자연현상과 인간 행위를 구분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가치 중립인 자연현상에는 의도가 없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은 행위, 즉 의도가 있는 행동을 한다. 개인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집단에는 집단의지가 있다. 그리고 가족에서 국가까지 집단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집단행위가 수행되어야 한다. 집단행위의 기저에는 집단의지가 깔려 있고, 집단의지는 자유의지의 동기화를 통해 형성된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집단의지로 동기화시키는 힘이 권력이다. 근대화 이전에는 소수 권력자의 자유의지에 의해 집단의지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자유시장 확산과 더불어 소비자 역할이 커지고, 동시에 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면서, 집단의지 동기화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왜 교육을 하는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교육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학생이나 부모로서 교육을 접한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질문은 개인적 관점이 아닌 ‘우리’ 공동체의 관점을 묻는 질문이다. 복잡한 집단의지의 동기화를 결정하는 핵심은 왜라는 질문의 대답이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일수록 왜라는 질문의 대답에 본질이 있다. 왜 교육을 하는지에 대한 답이 있어야,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교육할지에 대한 답들이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된다.
시대에 따라 변해온 교육의 역할
의대 입시는 왜 교육을 하는가를 생각해보기 좋은 주제다. 의대생에게는 헝즈몽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다. 의대 입학이 비교적 쉬우면서, 우리나라 의사 국가고시를 볼 자격이 주어지는 헝가리, 우즈베키스탄, 몽골 유학생을 의미한다. 물론 외국 의대라고 입학이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치원에 의대 입시반이 생겨날 정도인 국내 난이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최근 의대 선호 현상이 심화되면서 헝즈몽을 통한 의사 면허 획득 비결이 주요 일간지에서 대놓고 소개될 정도다. 입시에서 의대 쏠림은 정상범위에서 이탈한 지 오래다. 물론 의사를 꿈꾸는 학생이 많은 것을 비정상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 의사가 대중에게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직업의 하나라는 사실이 추가되면 비정상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가장 욕을 많이 먹지만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라는 아이러니는 높은 진입 장벽에서 기인한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타심이 아무리 커도, 면허 없는 의료 행위는 불법이다. 현대 국가에서 의사는 면허가 필수다. 그리고 한국에서 의료행위를 하려면 한국 면허가 필요하다.
의대의 인기는 의학이나 의술의 매력이 아니라, 면허의 희소가치에서 나온다. 집단 관점에서는 의사가 필요없는 사회가 바람직하다. 의료 수요는 아픈 사람이 있어야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회가 발전할수록 의사 면허의 인기가 올라간다. 그 정도가 심하기는 하지만, 사회 발전이 정체되면 전문직의 인기가 올라가는 것은 우리만의 특이 현상은 아니다. 면허를 국가가 통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의료 행위의 대상이 국민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의사가 돈을 버는 이유는 열심히 공부한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전문적 판단에 의한 무거운 결정의 대가다. 원하는 사람이 모두 의사가 된다면 그 집단은 지속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집단에 필요한 의사 면허의 총량을 국가가 정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교육 욕구는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만) 내가 원하면 의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개인을 위한 교육이 전면에 부상한 것은 아주 최근의 사건이다. 교육은 집단 구성원의 양육을 위해 시작되었다. 인류는 집단을 기반으로 진화하였고, 교육이 그 핵심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자연 생태계에서 현생 인류의 경쟁력은 정교한 소통을 기반으로 한 집단지성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집단지성의 지속적 발현을 위해서는 후속 세대 교육이 필수였다. 원시 부족들의 집단 경쟁 시대에서는 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교육이 잘되는 집단이 경쟁에서 앞섰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교육이 안되는 집단은 도태되었다. 또한 교육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전자는 소속 집단의 유전자 풀에서 소멸되었다.
문명이 시작되고 진화한 것은 유전정보가 아닌 지식정보다. 지식정보를 진화시키는 주체는 집단지성이다. 집단이 보유한 지식정보의 다양성과 진보성이 문명에서의 경쟁력을 결정하였다. 서양의 정보 진화가 가속화되면서 동서양 문명 격차가 벌어진 것이 그 적확한 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교육은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갈랐다. 근대 국가에서는 과학 기술이 국력이었다. 근대 교육의 특징은 이원체제다. 일반 교육의 목표는 시민 양성이었다. 과거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부른 이유다. 고등교육은 현대화된 아카데미, 즉 대학 설립을 통해 진행되었다. 국가의 체계적 교육을 통한 지식정보 진화의 활성화는 동서양의 문명 초격차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제국주의 팽창과 식민지 확산으로 이어졌다.
국가 교육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개인의 교육 욕구도 팽창하게 된다. 신분제가 지속되었던 전근대의 교육은 신분유지 수단이자 특권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문자에 마법이 있다고 믿었다. 글만 보고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마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 봉건제가 무너지고 산업혁명으로 연결되면서 교육에도 혁명이 일어난다. 봉건제에서 농노는 영주의 재산이었다. 영주의 영지에서 평생 살며 부모의 직업과 신분을 승계했다. 이때 교육은 부모의 양육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든다.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직업이 형성되고, 시장의 확장과 자본경제가 고도화된다. 이런 사회적 격동에서 교육은 신분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왜’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무한 경쟁
우리나라 교육 역시 사회 환경의 변화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서양문명의 변방에서 두 걸음 떨어져 있었던 우리나라는 늦었던 만큼 격렬한 홍역을 치렀다. 근대국가에 들어서지 못한 조선의 몰락,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병탄, 민족 분단과 이념의 대리전, 그리고 본격적 산업화 진입과 눈부신 발전. 불과 한 세기 동안 이토록 파란만장한 격동을 겪으며 중진국의 함정을 넘어선 유일한 국가가 우리 대한민국이다. 한강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이 도약의 배경에는 유례없는 교육열이 있다. 문제는 모두 화상을 입을 정도로 열기가 너무 뜨겁다는 것이다.
과거 고도성장기에는 개인의 신분상승 욕구와 국가발전이라는 집단의 목표가 일치하였다. 일단 최선을 다해서 경쟁하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갈 만큼 일자리가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는 선진국 초입에 접어들었다. 중진국과 선진국의 교육에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고도 산업성장기에 공대가 인기가 있었고, 성장동력이 줄어들면서 의사나 판사처럼 부작용을 다루는 전문직의 인기가 올라간다. 이제 무한경쟁이 성공을 보장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과거에 있기 있던 직업과 지금 인기 있는 직업의 특성은 다르다. 하지만 인기 있는 직업의 순위를 따지고 경쟁을 지속하는 것은 부모세대의 경험이 현재의 교육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 문제는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환경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것이 원인이다.
왜에 대답하지 못하는 무한경쟁은 병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고등학교 입학해서 시험을 못 봤다고 자퇴하는 학생들이 작년부터 부쩍 늘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내신 5등급제라고 진단한다. 소위 내신 성적 리셋을 위해서 자퇴를 강행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제도의 도입 의도는 과열 경쟁 줄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등급 변별력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치열한 경쟁이 중위권으로 확산되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는 능력주의와 서열화는 인류 집단의 본능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쟁을 강제로 없애는 불가능할뿐더러 비교육적이다. 자퇴도 입시전략의 하나가 된 판국에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왜 경쟁을 하는가의 답을 찾는 것이다. 그래야 올바른 방향으로 경쟁을 유도할 수 있다.
지식 자체보다, 필요한 지식 찾는 능력을
입시경쟁이 뜨거운 이유는 좋은 직업을 위해서다. 그런데 좋은 직업은 무엇일까? 돈을 잘 버는 직업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직업은? 존경받는 직업은? 이런 질문들은 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좋다는 것은 개인 영역이기 때문에 좋은 직업이 무엇인가에는 정답이 없다. 의사는 돈을 잘 버는 직업이지만 좋은 직업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을 돕고 고치는 것이 적성에 맞는 사람에게는 세상 좋은 직업이다. 하지만 적성이 맞지 않으면 매일 아픈 사람과 씨름해야 하는 괴로운 직업이 된다.
요즘 학생들에게 돈이 직업 선택의 전부가 아니라 조언하면 꼰대의 헛소리라고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직업에는 경제적 수단 이외에도 사회적 참여와 자아 구현의 수단이라는 의미도 있다. 특히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직업을 통해야만 개인의 사회참여가 가능하다. 돈은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통해서도 벌 수 있지만 지속가능한 사회적 효용감은 직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이 사회적 효용감은 서열 본능을 해소할 수 있는 중요 기제다. 인간이 서열에 집착하는 것은 집단 기반 진화의 부작용이다. 과거 자연 생태계에서는 집단에서 쫓겨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집단에서 자신의 위치를 계속 확인하는 서열화에 집착하는 것은 소멸의 공포 때문이었다. 이런 태고의 진화 관성이 현대 문명의 울타리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것이다, 현재 줄 세우기 가장 좋은 기준은 돈이다. 돈을 기준으로 하면 80억명도 한 줄로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왜 줄을 서는가? 결국 사회적 효용감 때문이다.
좋은 직업의 중요 요건은 개인의 적성이다. 적성에 맞는 직업에서는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효용감을 모두 얻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환경이 될수록 사회적 효용감의 중요성이 커진다. 각자도생으로 서로의 연결이 끊어져 가는 상황에서는 자기 존재의 인식이 흐려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이 스스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집단의 개입이다. 국가는 다양한 재능이 격려받고 사회적 효용감을 발휘할 수 있는 적재적소의 자리를 찾아가도록 학생들을 도와줘야 한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왜 교육을 하는가? ‘횃불을 건네라’는 최근의 의학교육 구호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의학은 3~4년 주기로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5~8년 뒤 환자를 보게 될 학생에게 지식만 가르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대신 새로운 지식에서 필요한 내용을 찾아 습득하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횃불은 무지의 어둠에서 필요한 지식을 스스로 찾아 밝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인공지능의 약진이 미래에 대한 예측을 흐리게 만드는 요즘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런 횃불이 필요할 것이다.
구성원이 불행한 집단은 지속되지 못한다. 좋은 직업을 원하는 이유도 결국은 행복한 삶을 원해서일 것이다, 우리가 교육을 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자기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다. 미래를 위한다고 현재의 희생을 강제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당장 현실에서 의미를 찾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는 아이는 어른이 된 미래에도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왜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하는 교육은 학생에게 형벌이다.
주철현 | 울산의대 미생물학·의학교육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