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전 세계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했던 대영제국이 남긴 최대 유산은 영어와 의회 민주주의다. 하지만 대영제국이 전 세계에 퍼트린 최고의 문화 컨텐츠는 누가 뭐래도 축구다.
영국 고위관료들은 축구를 식민 제국의 문화로 이식시켰고 영국 기업가들은 식민지에 철도와 공장을 지어 축구 클럽을 만들었다. 19세기 세계를 쥐락펴락했던 영국의 산업과 문화를 벤치마크 하려는 유럽 국가들은 축구를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생각했다.
대영제국 전성기에 뿌려진 이 씨앗은 축구를 20세기에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로 만드는 데 중요한 시작점이었다.
21세기 들어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는 영국 최고의 수출품이 됐다. EPL은 2025년 14조 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이는 스페인 라 리가나 독일 분데스리가 매출액의 두 배가 넘는 액수다.
EPL이 다른 유럽 프로축구 리그에 비해 매출액이 높은 결정적 이유는 해외 중계권 수입 때문이다. EPL의 해외 중계권 수입은 연간 4조 원이 넘는다. 이는 해외 중계권 수입 2위의 스페인 라 리가(1조 6000억 원)보다 약 2조 4000억 원이 많은 액수다.
이런 막대한 해외 중계권 수입은 EPL이 21세기 세계 최고의 스포츠 수출품이라는 평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미국프로풋볼(NFL)은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최대 스포츠 리그이지만 해외 수출에는 한계가 있다. NFL 전체 중계권 중에 해외 중계권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2%에 불과하다.
EPL 경기는 193개 국제연합(UN) 가입 국가 중에 191개국에서 중계된다. 사실상 전 세계가 잉글랜드에서 펼쳐지는 프로축구 리그를 시청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9일(이하 현지시간) 아스널이 EPL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때 케냐와 르완다 대통령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아스널의 우승을 축하했다. 보츠와나에서는 자국 아스널 팬을 위한 공휴일이 선포됐다는 가짜 뉴스가 나올 정도였다.
EPL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도는 인터넷 검색량에서도 확인된다. 구글에 따르면 202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한 검색량은 테일러 스위프트와 해리 포터 시리즈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EPL은 유행어도 창출하고 있다.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20일 "한국에서는 인생의 황금기를 '리즈 시절'이라고 표현한다"고 언급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스웨덴의 전직 재무부 장관은 최근 국내 경제 상황을 설명하면서 '스퍼시(Spursy, 토트넘스러운)'라는 표현까지 썼다. 올 시즌 가까스로 2부리그 강등 위기에서 벗어난 토트넘 홋스퍼를 빗대 스웨덴 경제가 토트넘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성 코멘트였다.
'해외 수출품'이라는 측면에서 EPL의 성장에는 물론 인류 최대의 글로벌 스포츠가 축구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EPL에서 대거 활약하고 있는 외국 선수의 영향력도 함께 존재한다. 올 시즌 무려 128개국에 온 외국 선수들이 EPL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모국에서 EPL팬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더욱이 EPL에서 활약하고 있는 외국 선수들은 들러리가 아니다. 이들은 EPL의 핵심 자원이다. 올 시즌 EPL에서 해외 선수들의 출전 시간 비율은 무려 75%였다. 이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62%나 스페인 라 리가의 44%의 비해 높은 수치다.
EPL은 외국인 감독들을 위한 무대이기도 하다. 올 시즌 EPL 20개 클럽 중 14개 클럽은 외국인 감독이 지휘하고 있다. 우승을 차지한 아스널의 미켈 아르테타 감독도 스페인 출신이다. 흥미롭게도 지금까지 소속팀을 EPL 우승으로 이끈 잉글랜드 출신 감독은 단 한 명도 없었다.
EPL 클럽의 구단주도 대부분 외국인이다. 올 시즌 20개 클럽 가운데 영국인이 소유한 EPL클럽은 5개에 불과하다.
세계인의 축구 리그로 자리잡은 EPL은 2025~2026 시즌에 전인미답의 기록에 도전 중이다. 이는 유럽 3대 클럽 대회(챔피언스리그, 유로파리그, 콘퍼런스리그)의 석권이다.
이미 EPL의 애스턴 빌라는 유로파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각각 27일과 30일에 펼쳐지는 콘퍼런스리그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는 크리스털 팰리스와 아스널이 올라 있다.
산업과 문화라는 측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EPL이 올 시즌 그라운드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압도적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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